AI 롤업에 대한 높아진 관심도
2025년 들어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가 바로 'AI 롤업'입니다. 원래 사모펀드(PE)의 기업가치 창출 방법론 중 하나인 롤업 전략은 비슷한 업종의 기업들을 여러 개 인수하여 하나의 큰 플랫폼으로 통합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기업가치를 높이는 전략이죠. 전통적으로 이런 접근은 사모펀드들이 성숙한 기업들을 인수하여 비용 절감과 운영 효율화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2024년부터 본격화된 AI 롤업은 기존 PE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습니다. PE가 주로 비용 절감에 초점을 맞췄다면, AI 롤업은 인공지능 기술을 통한 생산성 혁신과 새로운 가치 창출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생성형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사람의 지식 노동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면서, 전통적인 서비스업에서도 획기적인 효율화가 가능해졌다는 판단이죠.
특히 주목할 점은 AI 시대를 맞아 가장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유명 벤처캐피털들이 앞다투어 이 레이스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쓰라이브캐피탈(Thrive Capital), 제네럴카탈리스트(General Catalyst), 8VC 같은 대형 VC뿐만 아니라 일라드 길(Elad Gil)과 같은 솔로 GP(General Partner)까지 가세하면서 'AI 롤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키워드가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AI 롤업에 대한 기사는 많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각론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AI 롤업에 대해 ‘제대로’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고, 주요 플레이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 전략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과연 AI 롤업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결론난 이커머스 롤업의 전철을 피할 수 있을까요?
주요 플레이어들의 롤업 전략과 투자 기업
1️⃣ 쓰라이브캐피탈: 10억 달러로 시작하는 롤업 전략
접근 방법: 풀-스택 경영과 에버그린 펀드
쓰라이브캐피탈은 아마도 AI 롤업 전략에서 가장 야심찬 행보를 보이고 있는 VC입니다. 이들의 접근 전략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2024년 '쓰라이브홀딩스(Thrive Holdings)'라는 별도의 투자 비히클을 출범시키며 약 10억 달러 규모의 에버그린 펀드를 조성했습니다. 전통적인 VC 펀드와 달리 만기가 없는 에버그린 구조로 설계되어, 회수 압박 없이 오랜 기간 현금흐름에 기반한 기업가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째, '풀-스택 경영' 철학을 채택했습니다. 쓰라이브는 투자 후 단순 지분보유에 그치지 않고, 인수 기업의 경영 전반에 참여하여 소프트웨어 기술과 운영을 통합함으로써 최종 고객에게 향상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카림 자키(Kareem Zaki) 파트너의 말처럼 "소프트웨어만 팔아서는 부족하며, 회사를 직접 운영하면서 소프트웨어와 운영을 통합해야 진정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철학이죠.
셋째, 지배지분 확보를 통한 과감한 경영 참여입니다. 전통적인 VC가 소수 지분만 보유하고 경영에는 간접적으로만 개입했다면, 쓰라이브홀딩스는 지배지분을 확보하고 직접 경영에 참여합니다. 이를 통해 AI 기술 도입과 운영 혁신을 더욱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집중 분야: "일상 산업"의 AI 혁신
쓰라이브캐피탈은 "일상 산업(everyday industries)"으로 불리는 전통 서비스 분야에 AI 롤업 전략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목하는 분야의 공통점은 높은 인건비와 반복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술 혁신이 더디게 진행되어 AI 도입을 통한 혁신 여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타겟은 회계(Accounting) 업종입니다. 회계업은 데이터 정리, 감사 메모 작성, 세무 신고서 준비 등 반복적이고 규칙 기반의 업무가 많아 AI 자동화에 최적화된 분야이죠. 또한 미국 내에서만 수만 개의 중소 회계법인이 분산되어 있어 통합을 통한 규모의 경제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두 번째는 부동산 관리(Property Management) 분야입니다. 임대료 징수, 유지보수 관리, 입주자 상담 등 반복적인 업무가 많고, 지역별로 파편화된 시장 구조를 가지고 있어 AI 기반 플랫폼으로 통합할 여지가 큽니다. 특히 미국의 HOA(Homeowners Association) 관리 시장은 기술 도입이 늦어 혁신 기회가 풍부합니다.
향후 쓰라이브는 콜센터, 법률 서비스, 의료 행정 등 다른 "레거시 산업" 전반으로 AI 롤업 모델을 확장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전문 인력이 많이 투입되는 서비스업에서 AI 기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통합 운영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있죠.
대표 포트폴리오: 크레테 프로페셔널스 얼라이언스
크레테 프로페셔널스 얼라이언스(Crete Professionals Alliance, Crete PA)는 쓰라이브의 AI 롤업 전략을 대표하는 사례입니다. 2023년 설립된 이 회계법인 통합 플랫폼은 불과 2년 만에 미국 내 회계법인 20여 곳을 인수하여 연 매출 3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현재 미국 17개 도시에 900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미국 최대 규모 회계법인 중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크레테 PA의 사업모델은 간단합니다. 지역 기반의 중소 회계사무소들을 다수 인수하여 연합체를 구성한 뒤, 중앙에서 채용·행정·IT 등의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개별 법인에는 소수 지분을 남겨 기존 파트너들의 동기부여를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AI 기술의 실질적 도입입니다. 쓰라이브의 투자 이후 크레테 PA는 오픈AI와 제휴하여 회계업 특화 AI 도구를 개발·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데이터 매핑, 감사 메모 작성, 세무 서류 준비 등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고 있습니다.
쓰라이브를 비롯해 ZBS Partners,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Bessemer Venture Partners) 등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크레테 PA는 향후 2년간 추가 인수에 5억 달러 이상을 투입할 계획입니다.
2️⃣ 제네럴카탈리스트: 다각화를 통한 시장 선점 전략
접근 방법: 다분야 동시 진출과 기술-서비스 통합
제네럴카탈리스트(GC)는 쓰라이브보다 더 공격적이고 다각적인 AI 롤업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GC의 접근 방식은 한 분야에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분야에 동시에 진출하여 각 분야의 최적 모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AI로 콜센터 효율 극대화"부터 "병원 시스템 혁신"까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롤업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GC의 핵심 철학은 기술과 서비스의 완전한 통합입니다. 단순히 AI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기존 업체들에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서비스 제공업체를 직접 인수하여 내부적으로 AI를 접목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객 경험의 전 과정을 통제하고, AI 기술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전략이죠.
또한 GC는 각 분야별로 전문 플랫폼 회사를 별도로 설립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회계 분야의 어크루얼(Accrual), 콜센터 분야의 크레센도(Crescendo), 법률 분야의 유디아(Eudia), 부동산 관리의 롱 레이크(Long Lake) 등이 그 예입니다.
집중 분야: 전문 서비스업 전 영역 포괄
GC가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 회계 및 금융 서비스 분야입니다. 높은 인건비와 반복적 업무가 특징인 이 분야는 AI 자동화를 통한 효율 개선 여지가 큽니다.
둘째, 고객 지원 및 콜센터 분야입니다. 상담 응답, 문의 처리 등의 업무에 생성 AI를 적용하면 대폭적인 비용 절감과 서비스 품질 향상이 가능합니다.
셋째, 부동산 관리 및 지역 커뮤니티 분야입니다. 주택단지 관리, 임대 업무 등에서 AI를 통한 프로세스 자동화 가능성이 큽니다.
넷째, 법률 서비스 분야입니다. 계약서 검토, 판례 조사, 컴플라이언스 체크 등의 업무에 AI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헬스케어 분야입니다. 의료 기록 관리, 환자 데이터 분석, 병원 운영 효율화 등에서 AI의 활용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표 포트폴리오: 크레센도 - 콜센터 통합 플랫폼
크레센도는 GC가 지원하는 콜센터 분야 롤업 플랫폼으로, 기존 콜센터 운영 기업들을 인수(대표적으로 파트너히어로 등)하고 거기에 자체 AI 기술을 통합하여 콜센터 업무 효율을 높이는 모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VC가 콜센터 같이 기술 스타트업이 아닌 서비스 기업을 직접 인수하는 일은 이례적이지만, AI를 접목하면 콜센터의 응대, 지원 업무를 자동화하여 운영 마진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크레센도의 핵심 전략은 인수한 콜센터들에 생성 AI 기반의 자동응답 시스템, 실시간 상담 지원 도구, 고객 문의 분류 자동화 등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객이 문의를 하면 AI가 먼저 응답하여 간단한 문제는 즉시 해결하고, 복잡한 문제만 인간 상담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죠. 또한 상담 과정에서 AI가 실시간으로 상담원에게 적절한 답변을 제안하여 응답 품질과 속도를 모두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AI 도입을 통해 크레센도는 콜센터 업계의 만성적인 문제들 - 높은 이직률, 일관되지 않은 서비스 품질, 높은 운영비용 등 - 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초기 테스트 결과, AI 도입 후 고객 대기 시간이 40% 단축되고, 초기 해결률(First Call Resolution)이 25% 향상되는 등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일라드 길: 정밀 타격형 AI 롤업 전략
접근 방법: 투자-운영 시너지와 선별적 투자
솔로 GP인 일라드 길(Elad Gil)은 대형 VC들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략은 한 마디로 '정밀 타격'입니다. 대규모 자본으로 여러 분야에 동시 진출하는 대신, 약 3년간의 신중한 준비 기간을 거쳐 극소수의 가장 유망한 팀에만 집중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길의 핵심 철학은 "기술에 능한 인재와 PE에 능한 인재를 모두 갖춘 팀"이 성공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수십 개 팀과 미팅을 진행한 후 극소수만 선별하는데, AI 기술 역량만으로는 부족하고 기업 인수와 통합 운영 경험이 있는 인력이 필수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AI 롤업이 단순한 기술 투자가 아니라 복잡한 M&A와 운영 통합을 수반하는 사업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죠.
길의 또 다른 특징은 AI 솔루션 스타트업 투자와 롤업 플랫폼 투자간 시너지를 적극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즉, 각 분야의 'AI 무기'를 먼저 확보한 후, 이를 롤업 기업에서 활용하는 전략입니다. 예를 들어 법률 분야의 하비(Harvey), 의료 기록 자동화 어브리지(Abridge), AI 상담원 시에라 AI(Sierra AI) 등에 투자하여 기술적 토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후, 향후 해당 분야 롤업 시 이런 기술들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 포트폴리오: 에남 코(Enam Co.) - 직원 생산성 혁신 플랫폼
에남 코는 길이 지원하는 첫 번째 롤업 벤처로, 직원 생산성(worker productivity) 향상을 목표로 AI 기반 업무자동화 플랫폼을 구축하는 회사입니다. 2024년경 설립된 신생 기업이지만, 길의 조언과 투자로 시작해 안드리센 호로위츠(a16z) 및 오픈AI 스타트업 펀드 등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며 현재 기업가치가 3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에남의 핵심 아이디어는 다양한 지식노동 업무를 표준화·자동화하여 직원당 생산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문서 작성, 데이터 분석, 고객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 관리 등의 업무에 생성형 AI를 적용하여 사람의 작업 시간을 대폭 단축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향후 BPO(업무처리 아웃소싱)나 기업 백오피스 서비스 등 범용적인 사람기반 사업을 인수·통합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많이 본듯한 데자부, 이커머스 롤업
팬데믹 시대의 이커머스 롤업 광풍: 쓰라시오의 등장과 몰락
하지만 롤업은 벤처캐피탈 세계에 그리 생소한 단어는 아닙니다. 불과 몇 년 전인 2020-2021년 팬데믹 시기, 지금의 AI 롤업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델이 이커머스 분야에서 대유행했습니다. 그리고 선두주자는 바로 쓰라시오(Thrasio)였죠. 2018년 등장한 쓰라시오는 "아마존 FBA(Fulfillment by Amazon) 생태계의 성공적인 셀러들을 사서 모은다"는 단순명쾌한 전략으로 출발했습니다.
쓰라시오의 초기 성장은 경이적이었습니다. 설립 후 첫 2년간은 매출이 약 73일마다 두 배씩 증가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매우 설득력 있었죠. 아마존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브랜드들을 인수하여 하나의 플랫폼 아래 통합하면, 마케팅 최적화, 공급망 효율화, 데이터 분석 고도화 등을 통해 개별 브랜드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쓰라시오는 3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조달했고, 한때 기업가치 100억 달러를 넘나들며 '아마존 제국의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2021년 정점에서 쓰라시오는 아마존 플랫폼에서 5위 셀러로 올라섰고, 200여 개 브랜드를 인수하여 6000개 이상의 제품을 보유한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커머스 롤업의 매력적인 논리: 규모의 경제와 데이터 활용
당시 이커머스 롤업 모델이 투자자들에게 어필한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검증된 수익성이었습니다. 스타트업 투자와 달리 이미 수익을 내고 있는 아마존 브랜드들을 인수하는 것이어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여겨졌습니다. 아마존의 성숙한 FBA 시스템 덕분에 물류나 고객 서비스 인프라는 이미 갖춰져 있었고, 매출과 수익 데이터도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규모의 경제 효과였습니다. 여러 브랜드를 하나로 묶으면 아마존 광고 비용을 줄이고, 제품 개발 리소스를 공유하며, 공급업체와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특히 아마존 내 키워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개별 셀러들의 마케팅 비용이 급증하던 시기여서, 통합을 통한 마케팅 효율화 필요성이 절실했죠.
셋째, 시장 타이밍이 완벽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이커머스 급성장, 아마존 FBA 생태계의 성숙, 그리고 많은 중소 셀러들의 현금화 니즈가 겹치면서 인수 기회가 풍부했습니다. 특히 팬데믹 특수로 많은 아마존 셀러들의 매출이 급증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규모 확장보다는 매각을 통한 현금화를 원했습니다.
균열의 시작: 2021년부터 드러난 구조적 문제들
팬데믹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던 이커머스 롤업 모델은 불과 1년만인 2021년 여름부터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쓰라시오의 경우 창업팀이 회사를 떠나고 계획하던 SPAC 상장이 무산되면서 첫 번째 경고 신호가 울렸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통합의 복잡성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브랜드, 다른 제품 카테고리, 다른 고객층을 가진 수십 개 회사를 하나로 묶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각 브랜드의 고유한 정체성과 고객 충성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운영 효율을 높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많은 경우 무리한 통합이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죠.
두 번째는 팬데믹 특수의 종료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이커머스 급성장이 2021년 후반부터 둔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롤업 회사들이 팬데믹 기간 중의 높은 매출 기준으로 인수 가격을 책정했는데, 성장률이 정상화되면서 과도한 인수 가격의 부담이 드러났습니다.
세 번째는 마진 압박이었습니다. 중국 커머스 기업인 쉬인, 테무와 같은 직구 기업들이 초저가를 무기로 공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했고 아마존 플랫폼 내에서도 경쟁 심화로 마진이 지속적으로 압력을 받았습니다. 롤업 회사들이 기대했던 "마케팅 효율화"나 "구매력 개선" 효과는 이런 구조적 변화 앞에서 미미했습니다. 오히려 거대해진 조직의 운영비용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죠.
실패의 근본 원인: 꿈보다 해몽이 좋았다
결국 2024년 2월, 쓰라시오는 챕터 11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9천만 달러의 긴급 자금 조달과 함께 기존 부채 4억9500만 달러를 탕감하는 구조조정에 들어갔습니다. 한때 100억 달러로 평가받던 회사가 2023년 말 기준으로는 겨우 1억9390만 달러의 가치로 추락한 것입니다.
쓰라시오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를린 브랜즈 그룹, 셀러X, 헤이데이, 히어로즈, 퍼치 등 다른 주요 롤업 회사들도 잇따라 구조조정에 들어갔습니다. 일부는 아예 사업을 중단했고, 일부는 대폭적인 규모 축소를 통해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이커머스 롤업의 몰락의 원인은 간단합니다. 원래는 PE가 조용히 진행하는 롤업 전략이 벤처캐피탈의 버블 싸이클과 만나며 역시너지가 난 것이죠. 관련 분야에 회사 당 수천억 원의 자금이 몰리며 부실 자산에 대한 무분별한 인수가 벌어졌고, 이는 포트폴리오 전체의 품질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시너지는 과대평가되었고 PMI는 과소평가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브랜드들을 합친다고 해서 자동으로 1+1이 3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오히려 각 브랜드의 고유성이 희석되고, 복잡한 통합 과정에서 운영 효율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역사상 최저 금리 시대에 대량의 부채를 동원해 진행한 인수는 금리 상승과 성장 둔화가 겹치면서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특히 재고에 묶인 자금이 너무 많아서 유동성 위기를 겪은 회사들이 속출하며 이커머스 롤업은 짧은 부흥기를 거쳐 실리콘밸리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본질은 새로운 실험이다
이커머스 롤업의 흥망성쇠는 현재 주목받는 AI 롤업에도 투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기회는 ‘이번에는 달라’라는 내러티브와 함께 등장하지만 진실은 결국 시간이 말해주기 때문이죠. 우선 AI 롤업은 다르다는 주장도 귀담아 들어볼 필요는 있습니다.
AI 기술은 이커머스 시절의 '데이터 분석'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고 측정 가능한 효과를 가능하게 합니다. 실제로 사람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마케팅 최적화나 재고 관리 정도에 그쳤던 이커머스 롤업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또한 AI 롤업의 타겟 시장들(회계, 법률, 의료 등)은 이커머스보다 진입장벽이 높고 안정적입니다. 면허나 자격이 필요한 분야들이어서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 치열하고, 고객 관계도 장기간 유지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가격보다는 신뢰성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시장이어서 무분별한 가격 경쟁에 휘말릴 가능성도 낮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들도 많습니다. 통합의 복잡성은 여전히 유효한 도전입니다. 로펌과 로펌, 회계펌과 회계펌을 합친다고 해서 자동으로 시너지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 서비스업의 경우 개인의 전문성과 고객 관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성급한 통합이 오히려 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AI 롤업 전략은 이제 막 시작된 신규 투자 실험이라고 봐야 합니다. 게다가 벤처캐피탈들이 대형화 및 전문화되면서 새로운 전략에 대한 실험이 분출하는 시기입니다. AI 롤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AI가 원동력이 아닐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죠. 실제로 제네럴카탈리스트, 쓰라이브캐피탈, 코슬라 벤처스 등 유수의 벤처캐피탈들은 이러한 흐름에 가담하면서, 전통 산업의 기술적 재편이라는 담대한 목표를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핵심은 AI 자동화로 인한 부가가치가 어느 정도 실현될지입니다. AI 발전이 둔화되거나 예상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커머스 롤업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규제 환경의 변화나 경제 상황 악화 등의 외부 요인도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AI 롤업 전략은 이제 막 시작된 흐름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성공 사례는 적어도 1 - 2년은 지나야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Service-as-a-Software 시대를 맞이하여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운영 역량을 결합한 가치 창출 모델이 과연 새로운 투자 전략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흥미가 더해지는 시점입니다.